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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리는 저시력 장애인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기능은 이미 PC에 구현돼 있고 글자 크기와 고대비, 확대 기능을 자신의 상태에 맞게 설정해 쓰고 있다. 허나 다른 저시력자가 그녀의 PC를 쓰거나, 메리가 다른 PC를 쓸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PC마다 자기 상태에 맞게 접속 환경을 설정하는 일은 복잡하고 어렵다. 보다 강력한 기능을 갖춘 보조기기를 돈을 주고 샀지만, 정작 회사나 다른 사람 PC에선 이를 쓸 수 없다. 그래서 노트북을 따로 샀지만, 매번 들고 다니기도 번거롭고 회사나 도서관 등에서 접속하려면 별도의 접속 프로그램을 내려받으라는 경고가 뜨기도 한다. 그러니 노트북이 있어도 원하는 정보에 접속하고 자기 환경에 맞춰 이용하기란 산 넘어 산이다.

#2.

마리아는 도서관 사서다. 그녀는 노약자나 장애인이 도서관을 찾으면 그들을 위한 서비스를 안내해주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장애 유형도 제각각이고 사람마다 원하는 기능도 달라서 이를 다 숙지하기란 어렵다. 다양한 장애 환경에 맞는 보조기기를 구입하자니 비용도 만만찮다. 나름 강력한 기능을 제공하는 보조기기를 몇 개 사긴 했지만, 일부 장애인이나 노약자에겐 무용지물이다. 특히 어린이나 기기별로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경우엔 그렇다. 방문객들이 이 보조기기 사용법을 익히는 일도 쉽지 않다. 도서관 IT 사업부는 이런 보조기기 솔루션이 쓰기 어렵고 유지 비용도 만만찮으며, 보안 문제도 걸려 있다고 불평한다.

 

위 두 사례를 보자. 몇 가지 문제점이 눈에 띈다. 장애인들은 PC나 휴대기기로 디지털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보조기기를 쓴다. 시각장애인은 글자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소프트웨어를 쓰거나 점자 단말기를, 청각장애인은 음성을 자막으로 변환하는 도구를, 저시력자는 화면 확대기를 쓰는 식이다. 장애 유형이나 정도에 따라 쓰는 보조기기 종류도 다르다. 같은 기능을 하는 보조기기라 해도 PC나 스마트폰으로 접속할 땐 각각 다른 보조기기를 설치해 써야 한다.

문제는 또 있다. 같은 보조기기를 쓰더라도 장애 정도에 따라 설정이 달라진다. 자신이 쓰는 보조기기가 갖춰져 있지 않은 PC나 다른 기기에선 정보 접근이 제한된다. 그러다보니 장애인은 평소 쓰는 PC에서만 온라인 세상에 제대로 접속할 뿐, 이를 벗어나면 높은 울타리가 정보 접근을 가로막는다. 낯선 곳에서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주변 기기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이 모든 사항을 고려해 통합 지원 환경을 마련하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해보인다.

GPII(Global Public Inclusive Infrastructure)는 이런 복잡하고 다양한 장애인 접속 환경을 두루 고려한 글로벌 접근성 지원 프로젝트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전세계 공공 통합 기간시설’쯤 되겠다. 목표는 간단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떤 기기로 접속하더라도 그에 맞는 접속 환경을 제공하자는 얘기다. 그것도 값싸고 쉬운 방법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GPII는 클라우드 컴퓨팅과 초고속 인터넷망, 오픈소스 기반 협업 방식에서 해답을 찾았다.

 

 

단순화하면 이렇다. GPII는 클라우드 컴퓨팅 기반 서버에 장애인별 접속 정보를 암호화해 저장한다. 만약 시각장애인 A가 책을 검색하러 공공 도서관 PC에 앉았다 치자. 이 PC에서 GPII 서비스를 제공하는 웹에 접속하면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쳐 클라우드 서버에서 장애인 A에게 꼭 맞는 접속 환경을 PC에 띄운다. 여기엔 평소 A씨가 즐겨쓰는 보조기기나 서비스도 포함돼 있다. PC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접속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A씨는 언제, 어디서, 어떤 기기를 쓰더라도 평소 접속 환경을 늘 유지하면서 디지털 정보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A씨가 지불해야 할 비용도 아주 적거나 무료다.

원대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구상일까. 각 과정별로 들여다보면 좀 더 정교한 장치가 엿보인다. 먼저 인증 방식을 보자. GPII는 개인 인증과 익명 인증 방식을 모두 지원한다. 장애인이 자신에게 꼭 맞는 접속 환경을 불러오려면 개인 인증 절차를 거친다. 각 장애인에겐 숫자로 된 개인 인증 코드를 부여한다. GPII 서비스를 띄워 이 숫자만 넣으면 클라우드 서버가 미리 저장해둔 접속 설정을 해당 기기에 띄운다. 인터넷만 연결돼 있으면 문제 없다.

 

인증 숫자를 직접 넣기 어렵다면, 미리 인증키를 저장해둔 USB 메모리나 메모리카드를 PC나 휴대기기에 꽂아도 된다. 개인 인증 방식이 싫다면, GPII가 유형별로 미리 만들어둔 수백여가지 범용 설정 가운데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고르면 된다. 스마트폰 같은 휴대기기로 직접 인증하는 방식도 앞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GPII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장애인은 매번 다른 기기를 쓸 때마다 일일이 자신에게 맞는 접속 환경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PC나 휴대폰에 따로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 인증 절차도 따라하기 방식으로 몇 단계만 거치면 간단히 이뤄진다.

 

보안 기능도 갖췄다. 이용자가 개인 프로필을 만들었다 해도 이는 클라우드 서버에 암호화돼 보관된다. 그러니 시스템 관리자조차 해당 프로필이 누구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주요 데이터는 클라우드 서버에 수시로 백업되지만, 개인이 원한다면 PC나 USB 메모리에 데이터를 따로 저장해둘 수도 있다. 인터넷 연결이 끊어지거나 기존 데이터가 손상되더라도 기존 접속 환경을 이용할 수 있게 한 정책이다.

개인 프로필엔 본인 확인 정보 뿐 아니라 접속 승인 정보와 결제 정보까지 포함돼 있다. 만약 더 낫고 강력한 보조기술이나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장애인이라면 GPII가 제공하는 배급망에서 원하는 기술이나 서비스를 돈을 내고 써도 된다. 한 번 구매한 제품이나 서비스 정보는 고스란히 프로필에 담긴다. 그러니 어떤 장소나 기기에서든 개인 인증만 거치면 해당 서비스를 언제든 불러와 쓸 수 있다. 이런 프로필은 기업이나 학교, NGO 단체 등이 상용 보조기술과 서비스를 쉽고 편리하게 살 수 있게 돕는 역할도 한다.

 

주문형 도우미(Assistance on Demand, AOD) 서비스도 눈여겨 볼 만 하다. GPII는 이용자가 PC나 휴대기기로 웹서비스에 접속했을 때 어려움이 발생하면, 곧바로 적절한 도우미 서비스를 불러올 수 있게 했다. 예컨대 시각장애인이 웹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캡차(CAPCHA) 코드를 넣어야 한다고 치자. 화면을 읽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그 자리에서 GPII가 제공하는 ‘비주얼 도우미’를 불러내 글자를 음성으로 듣고 코드를 입력하고 나면, 도우미 기능이 꺼지는 식이다.

그렇다고 장애인 이용자가 GPII 서비스를 쓰기 위해 따로 기기나 PC를 갖출 필요는 없다. GPII는 흔히 쓰는 PC나 휴대기기에서 주요 서비스를 무리없이 쓸 수 있도록 범용 드라이버를 제공한다. 이 드라이버를 설치하면 기존 PC에 달린 평범한 웹캠을 이용해 눈동자나 머리를 움직여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이고 PC를 제어할 수 있다. 굳이 상용 보조기기나 특정 환경에 맞춘 서비스를 쓰지 않아도 적은 비용 또는 무료로 장애인이 PC나 휴대기기 등에 접근할 수 있게 하자는 얘기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장벽도 있다. ‘정서적 거부감’이다. 어떤 나라든 자국민 정보를 국경을 벗어난 구름 속 가상 공간에 저장하는 걸 흔쾌히 허락하겠는가. 게다가 나라마다 개인정보를 다루는 정책도, 프로그램도 다르다. 그래서 GPII는 나라별 공공 통합 기간시설인 ‘NPII’(National Public Inclusive Infrastructure)를 갖추고, 이 NPII가 협업 방식으로 통합망을 구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즐겨쓰는 협업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해나가는 모양새다.

GPII는 프로젝트가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프로젝트에 쓰는 장애인 보조기술이나 서비스, 제품 등은 되도록 최신 주류 기술을 쓰기를 권장한다. 숨가쁘게 발전하는 IT 기술과 시장 변화를 손쉽게 따라가기 위해서다. 전세계 커뮤니티는 다양한 아이디어나 시험용 제품을 수시로 올린다. 이같은 아이디어나 시제품을 적은 비용으로 빠르고 쉽게 이용자들에게 적용되도록 돕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도 프로젝트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다. 시장을 지배하는 유명 IT 기업이나 제조업체가 GPII 범용 모듈과 시스템 도입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서비스 이용자 접점을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GPII는 이 프로젝트가 개발자와 기업, 정부와 공공영역 모두에게 도움을 준다는 점을 강조한다. 보조기기나 SW를

 

만드는 기업은 GPII가 제공하는 범용 모듈과 API를 활용해 자사 제품에 손쉽게 장애인 접근성 기능을 덧붙이고, GPII 배급망을 활용해 제품 판매와 홍보 효과도 얻을 수 있다. 웹 개발자는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데 드는 비용을 덜면서 GPII가 제공하는 범용 개발도구를 활용해 손쉽게 작업을 하고, 시장에 나와 있는 보조기기와 호환성도 더불어 확보할 수 있다. 정부는 장애인 맞춤 접속환경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대신, 관련 예산을 보다 효율적인 사업에 집중할 수 있어 좋다.

GPII는 이 모든 접근 환경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GPII가 적은 비용으로 장애인 보조기술과 서비스를 보다 쉽게 개발하도록 돕는 프로젝트란 점을 강조한다. 결제 프로필과 배급 시스템을 제공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IT 기업들은 자사 제품에 장애인 접근성을 더하고 시장까지 확대할 수 있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개발자는 장애인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해 따로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오픈소스 개발자라면 전세계 협업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가 만든 보조기술과 서비스를 배포하고, 보다 완성도 높은 프로젝트로 확장할 기회를 얻는다.

 

 

이 프로젝트는 그레그 밴더하이든 미국 위스콘신-메디슨대 교수가 주도하고 있다. 밴더하이든 교수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등 50여곳에 이르는 거대 IT 기업에서 접근성 제고를 위한 자문을 맡은 바 있는, IT 접근성 분야 세계적 권위자다. 그는 지난 3월14일 미국 샌디에고에서 열린 장애인 정보통신 박람회 ‘CSUN 2011′ 행사에서 GPII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GPII는 IT를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플랫폼과 클라우드 기술의 결합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자원 투입이 거의 없이 언제 어디서나 IT 정보에 접속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인 접근 환경을 제공하는 처음이자 유일한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재원 확보도 차근차근 진행되는 모양새다. 유럽연합(EU)은 GPII 프로젝트에 1천만달러, 우리 돈으로 110억여원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둘은 투자 규모와 지원 방법 등에 대한 협의를 끝내고 3월 넷쨋주 안에 최종 사인을 마칠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도 200만달러 규모의 매칭 펀드를 진행하고 있다.

 

GPII는 클라우드 컴퓨팅과 초고속 인터넷, 오픈소스 협업 기반으로 전세계 장애인에게 값싸고, 쉽고, 효율적인 IT 접근성을 보장하려 한다. 그 밑그림은 훌륭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나와 있지 않은 모양새다. 나라별 조직들의 활성화 여부와 전세계 오픈소스 커뮤니티의 참여도가 성패를 가르는 변수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얼마나 적극 참여할 지도 두고볼 대목이다.